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이 붕~떠 있는 느낌이다.어제밤 자정 가까이 돼서야 집에 돌아와 어떻게 씻고 잠을 잤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기계처럼 업무준비를 마치고 이 글을 쓰면서도 소*중*대청봉과 이어진 귀때기봉 그리고 그 너머 가리봉과 연봉들에 이르게 까지 그야말로 온 사방에 걸쳐 솜털처럼 짙게 깔려있던 그 운해의 파노라마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온통 정신이 홀린 느낌이다. 분명 마음을 거기에 놓고 온 모양이다.

종주등반의 매력이란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 그리고 결국 이겨낸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는 또하나의 짧은 인생단막극이라는데 있다. 산매니아들이 늘 달고사는 생각이 있다면 한번 산에 들어가 자연에 푹 담궈보고 싶다는 유혹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금년 추모등반의 산행계획이 나왔는데 설악산종주가 아닌가. 장마전선도 안 오신다니 기회다!

총9명의 대원이 확정됐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지만 그 대신 단촐해서 좋다. 아쉬운 점은 산악부 최고의 일꾼인 총무께서 훈련중 쇄골부상으로 인한 합류포기였다. 그렇다면 회장이 등반대장겸 총무겸 거기에 덧붙여서 막내몫까지? 아! 이 무슨 얄굿은 경우가...

출발 며칠 전 아무래도 분위기파악이라도 해야겠다싶어 능력있는 자에게 일감이 몰린다는 둥 위로문자를 띄우며 필요한걸 물으니 자기 몸집 만큼이나 화통한 만사 오케이 답변이다. 침낭과 메트리스만 준비하시면 되고 그것도 없으면 본인이 대여해 준다나.. 산장에서 자는데 왠 침낭? 요쯤해서 내가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그걸 놓쳤다.

새벽잠 없어진지 오래된지라 일찌감치 동서울터미날에 도착해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매표소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까지 대장이지 싶다. 뒤이어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승차준비. 주말 나들이로 승객이 많이 몰리는 바람에 좌석번호가 띄엄띄엄 나뉘어져 2시간 반동안 얌전히 백담사 입구까지 갔다.

대원들이 60대 초중반에서 제일 연장자인 내가 내년에 칠순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나이니 얘기꽃 주제는 자연스레 그때 그시절이다. 용대리에서 걸어 백담사까지 힘들었던 행군, 돌고 또 돌아도 나오지 않는 백담산장, 넓직하고 확 트인 백담사 앞 냇가의 정겨웠던 모습들이 각자의 추억창고에서 흑백사진으로 쏟아져 나온다.

옛 백담산장이 대피소란 이름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층의 시커멓고 굵직한 돌로 쌓아 올린 옛모습은 보이지 않고 작고 하얀색 돌로 흉내만 낸 이층집에 네온으로 둘러쳐 숲속에서 뽑내는 모습이 노등산객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운치가 아닌데 생각하며 감상에 젖는가 싶었는데 본격적인 산행준비의 오더가 떨어진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잖다.